제목: 새롭게 생겨난 문제를 인식하는 것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저) 날짜: 2021. 3. 23. --- 새롭게 생겨난 문제를 인식하는 것 -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저) <사피엔스>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의 책인데요, 저는 사피엔스보다 더 흥미로웠습니다.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이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의 결론은 조금 당혹스럽기는 합니다. ​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 때 구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우리 자신의 정보 검색 능력은 갈수록 감퇴한다. 오늘날 이미 ‘진실’은 구글 검색의 최상위 결과와 동의어다. (사람들이 어떤 답을 구글에서 찾기라도 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은 곳이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무엇을 공부할지, 어디에서 일할지, 누구와 결혼할지를 선택할 때도 AI에 기대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의사 결정의 드라마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민주 선거와 자유 시장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와 예술 작업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정권은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아는 데서 더 나아가 마음대로 당신의 기분을 조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재자는 의료보장이나 평등을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적들을 증오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는 현재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은 ‘디지털 독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AI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경고합니다. 사실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논해온 바가 있기도 합니다. ​ 불행하게도,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친밀한 공동체는 실제로 와해돼왔다. 정말로 서로가 서로를 아는 소집단을 민족과 정당이라는 상상 공동체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동포가 수백만이고 공산당 동지가 수백만에 이른다 해도 그들은 한 사람의 진짜 형제자매나 친구와 같이 따뜻한 친밀감은 줄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없이 잘 연결된 지구상에서 더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이런 불안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연결되기 위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경험 공유’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부추긴다. 어떤 신나는 일이 일어났을 때 페이스북 사용자가 직감적으로 하는 행동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린 다음 ‘좋아요’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의 느낌마저 점점 더 온라인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은 동시에 여러 집단에 충성심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친밀한 관계는 제로섬 게임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온라인으로 이란이나 나이지리아의 친구들을 알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과정에서 옆집 이웃을 아는 능력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거꾸로 육신을 가진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있는데, 이런 로컬한 공동체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국가 단위의 제도는 전례 없는 일련의 지구적 곤경을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전 지구 차원의 생태계와 경제와 과학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민족 단위의 정치에 고착돼 있다. 이런 부조화 때문에 정치 체제가 우리의 주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한 가지 해법이 있다면, 그것은 겸허함이다. 민족과 종교, 문화 간의 긴장이 악화되는 원인은 나의 민족, 나의 종교, 나의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나의 이익이 다른 누구의 이익이나 전체 인류의 이익보다 앞서야 한다는 자만심 때문이다. 한편 완전히 글로벌한 공동체가 힘을 얻었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글로벌하지도 않고 로컬하지도 않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애매한 공동체만 강해지는 것이 문제를 더욱 악화하고 있을지도요. ​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하고, 이라크나 우크라이나가 지도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정책을 두고 극도로 강한 견해를 고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은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그런 와중 많은 사람들이 균질해져가는 커뮤니티와 뉴스피드 속에서 점차 멍청해져갑니다. 가치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 — 자신의 뇌 —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 — 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매트릭스를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특히 기술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게 됨에 따라, 기술이 나에게 봉사하기보다 내가 기술에 봉사하게 될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수록 외부 조작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 우리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언제나 국가 선전, 아니면 이념적 세뇌, 상업 광고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생화학적인 결함도 포함된다. 우리는 투명한 도화지같은 존재가 아니라 이미 온갖 먹물과 물감이 끼얹어진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에는 도화지가 아니라 조미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존재는 다른 존재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영향이 더욱 의도적으로 가해질 것입니다. ​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참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 속아 넘어가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바보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특정한 믿음을 위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신앙은 더 강해진다. 어떤 이야기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고통을 가할 때는 이런 선택이 주어진다. ‘이 이야기는 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잘 속는 바보다.’ 그 고통을 타인에게 가할 때도 선택이 주어진다. ‘이 이야기는 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잔혹한 악당이다.’ 우리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악당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쪽을 택한다. 인간은 분명히 의지도 있고 욕망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욕망을 실현할 자유도 있다. 만약 ‘자유 의지’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면 물론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 하지만 ‘자유 의지’가 욕망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뜻한다면 인간에겐 아무런 자유 의지가 없다. '믿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 자기 탐색의 과정은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 갈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처음에는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단계는 쉽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은 더 어렵다. 궁극에는 우리의 욕망,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인간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허구적 이야기를 만들고 믿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특히 우리는 허구와 실체의 차이를 아는 데 서툴다.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만약 그럼에도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면 시작점은 고통이다.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은 고통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출발점을 찾았던 것처럼, 유발 하라리는 몸과 고통에서 출발합니다. 기술이 개선되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돌칼이 점차 핵 미사일로 진화함에 따라 사회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더욱 위험해졌다. 둘째, 동굴 벽화가 점차 티브이 방송으로 진화함에 따라 사람들을 속이기는 더 쉬워졌다. 가까운 미래에 알고리즘은 이 과정이 완결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관한 실체를 관찰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질 수 있다. 장차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자신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알고리즘일 것이다. 앞으로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은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탐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회를 활용하고 싶다면 지금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먼 여정을 돌아 유발 하라리는 ​ 조금 벙찌는 용두사미 결말같은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 요즘 유행하는 마인드풀니스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오직 현실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행복론과도 와닿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명상'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여행의 종착점이 명상이라는 건 좀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 ​ 글로벌화와 기술 발전-특히 AI 발전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고찰한 책으로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 2021년도 믿음을 경계하고, 기술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잘 살아봐야겠습니다.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912142 ​